폐암은 세계적으로 부동의 암 사망률 1위다. 한국인도 예외는 아니다. 국가암등록통계(2019년 기준)에 따르면 폐암으로 인한 국내 사망자는 1만 8,574명으로 전체(8만 1,203명)의 22.9%를 차지해 모든 암 중 사망률 1위를 기록했다. 수치로 볼 때 30분마다 1명씩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폐암의 위협은 현재 진행형이다. 2015년부터 2019년 폐암 발생률은 연평균 3.2%씩 증가했다. 2019년 갑상샘암(3만 676명) 다음으로 신규 환자가 많은 암이 폐암(2만 9960명)이었다. 국가암검진사업 대상인 6대 암 중 위암, 대장암, 간암, 자궁경부암은 최근 10여 년간 감소 추세지만 폐암은 요지부동이다. 대기오염, 열악한 조리환경, 간접흡연 등의 영향으로 비흡연자 폐암 환자도 전체의 30%를 넘나들고 있다.
증가하는 폐암 발생률·사망률은 아이러니하게도 항암제의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이윤을 추구하는 제약·바이오 업계가 적극적으로 신약 개발에 나서면서 폐암 환자 생존율과 삶의 질에도 의미 있는 변화가 찾아오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항암제 세대별 구분
1세대 화학 항암제: 화학약믈을 체내 주입해 암세포 공격, 일반 세포까지 공격해 부작용이 큼. 2세대 표적 항암제: 암세포만 공격하지만 내성 문제 존재. 3세대 면역 항암제: 체내 면역체계를 이용해 암세포 공격
특정 유전자 타겟으로 한 '표적' 항암제
폐암은 초기 화학 항암제에서 현재는 표적·면역 항암제 사용이 일반화됐다. 표적 항암제는 폐암을 유발하는 특정 단백질(유전자)에 작용하는 약이다. 암세포는 정상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키면서 생긴 잘못된 신호로 인해 발생, 생존하는데 이를 억제하면 암의 비정상적인 증식을 막을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개발된 약이 표적 항암제다. 화학 항암제가 전신에 작용하는 것과 달리, 표적 항암제는 폐암과 관련된 특정 분자만 선택적으로 억제해 부작용은 적고 치료 효과는 더 강하다.
2000년대 초반 표적 항암제가 최초로 등장할 때 '주요 타겟'은 상피세포 성장인자 수용체 변이(이하 EGFR 변이)였다. 폐암은 크기와 형태에 따라 크게 비(非)소세포폐암과 소세포폐암으로 나뉜다. 전체 80~85%가 비소세포폐암으로 이 중 30%가량에서 EGFR 변이가 발견된다. 환자가 많아 연구가 빠르게 진행될 수 있고, 개발 후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가능성이 커 제약·바이오 기업의 1차 타겟이 됐다.
EGFR 변이에 작용하는 표적 항암제는 발전을 거듭하며 현재는 앞서 나온 표적 항암제가 듣지 않거나, 내성이 생길 때 쓰는 후속 항암제도 개발된 상태다. 아스트라제네카의 '이레사'(성분명 제피티닙)를 시작으로 로슈의 '타쎄바'(성분명 엘로티닙) (이상 1세대), 베링거인겔하임의 '지오트립'(성분명 아파티닙), 화이자의 '비짐프로'(성분명 다코미티닙) (이상 2세대), 아스트라제네카의 '타그리소'(성분명 오시머티닙)와 유한양행의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 (이상 3세대) 등 현재 쓰이는 EGFR 변이 폐암의 표적 항암제만 해도 총 6가지나 된다.
2010년대에는 화이자의 '잴코리(성분명 크리조티닙)를 시작으로 역형성 림프종 인산화요소 변이(이하 ALK 변이)의 표적 항암제가 출시됐다. ALK 변이는 비소세포폐암의 5%가량에서 확인되는데 특히 뇌 전이가 잘돼 사망률이 높았다. 내성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바티스(자이카디아, 성분명 세리티닙), 로슈(알레센자, 성분명 알렉티닙, 다케다제약(알룬브릭, 성분명 브리가티닙)은 물론 화이자도 최근 '로비큐아'(성분명 롤라티닙)라는 신약을 개발하며 환자 치료 선택지도 폭넓어졌다.
나아가 최근에는 상대적으로 드문 유전자 변이를 타겟으로 한 표적 항암제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이에 해당하는 표적 항암제가 다수 허가를 받았는데, 대한암협회는 이런 희귀 유전자 변이의 진단, 치료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각 유전자 변이의 앞글자를 따 '미스터 케이(MR K: MET, RET, KRAS)'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암젠의 먹는 약인 '루마크라스'(성분명 소토라십)는 세포의 분화, 증식, 생존을 조절하는 KRAS라는 유전자 변이를 선택적으로 억제한다.
KRAS 변이는 비소세포폐암의 발병 원인으로 환자 10명 중 1명에게서 이 변이가 발견된다. KRAS 중 특정 위치(G12C)에 변이가 발생하면 세포 복제 신호가 꺼지지 않아 암이 발생하는데, 루마크라스는 해당 유전자 변이 부위에 달라붙어 암의 '스위치'를 끈다. 루마크라스는 지난해 5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KRAS 변이 비소세포폐암 표적치료제로 허가를 받은 후 올해 8월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쓰일 예정이다.
릴리의 '레테브모'(성분명 셀퍼카티닙)는 비소세포폐암 환자 2~6%에서 나타나는 RET 유전자 변이에 작용하는 표적 항암제다. RET 변이가 있는 폐암 환자는 일반 폐암 환자보다 뇌 전이의 위험이 2배가량 높아 더 치명적이다.
레테브모는 RET가 다른 유전자와 융합, 또는 점 변이해 유발되는 암을 모두 억제할 수 있다. 기존 화학 항암제보다 선택적으로, 더 끈질기게 암세포를 공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3월부터 전이성 RET 융합-양성 비소세포폐암 성인 환자의 치료에 허가를 받아 사용되고 있다. 비슷한 시기 동일 기전의 표적 항암제인 로슈의 '가브레토'(성분명 프랄세티닙)도 식약처의 허가를 획득하기도 했다.
노바티스의 MET 변이 표적 항암제 '타브렉타'(성분명 카프마티닙)는 인산화 반응을 차단해 MET의 신호전달체계가 비정상적으로 활성화하는 것을 막는다. EGFR과 MET에 모두 작용하는 얀센의 '리블리반트'(성분명 아미반타납)는 암의 성장을 억제하는 동시에 면역 체계를 활성화해 암을 죽이는 효과가 있다. 임상 시험에서 반응률은 40%, 지속시간은 11개월을 기록해 기존에 마땅한 치료법이 없던 폐암 환자에게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면역 체계 자극하는 '면역' 항암제
표적 항암제는 일단 약효가 드는 환자에게는 더 없는 '명약'이지만 해당 유전자 변이가 없는 환자에게는 효과가 없다. 치료 대상이 국한된데다 약이 더는 듣지 않는 내성 이슈도 극복해야 하는 과제다.
종전에는 표적 항암제를 쓰지 못하는 환자는 화학 항암제 외에 별다른 치료법이 없었다. 이를 극복하는 약이 면역 항암제다. 암 자체를 공격하는 기존 항암제와는 달리 인공 면역 단백질을 체내에 주입해 면역체계를 자극함으로써 면역세포가 선택적으로 암세포만을 공격하도록 유도하는 치료제다.
비소세포폐암에는 MSD의 '키트루다'(성분명 펨브롤리주맙) 로슈의 '티쎈트릭'(아테졸리주맙) 아스트라제네카의 '임핀지'(성분명 더발루맙), BMS제약의 '옵디보'(니볼루맙) 등 다양한 면역항암제가 단독 혹은 병용요법으로 쓰이고 있다. 암 세포는 정상세포가 가지고 있는 'PD-L1'라는 단백질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자신을 위장하는데, PD-L1의 발현 정도에 따라 면역 항암제를 골라 쓰면서 치료 효과를 극대화한다.
항암제라는 무기의 개발에 이어 독한 암을 치료하기 위한 전략도 다양해지고 있다. 특히, 몇 개의 항암제를 한꺼번에 쓰는 병용요법은 최신 폐암 치료 트렌드다. 암과 관련한 신호를 동시에 차단해 치료 효과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키트루다의 경우 올해 초 화학 항암제와 병용요법 시 1차 치료까지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며 실질적인 치료 효과를 인정받았다. 얀센과 유한양행은 리브레반트, 렉라자의 병용요법 임상 3상을 진행하고 있다.
한 글로벌 제약사의 임원은 "지금까지 여러 항암제를 개발해온 역사를 볼 때 하나의 신약은 모든 암 환자의 해답이 되긴 어렵다"며 "여러 제약사가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과 기술 이전 등 경쟁이 아닌 협력을 통해 새로운 치료법을 모색하는 상황에서 향후 병용 요법이 폐암 치료의 새로운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